‘그 전쟁’을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가
한국전쟁은 ‘남침’인가 ‘북침’인가
공개된 소련 문서가 ‘남침'의 근거가 될 수 없다
한국전쟁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나?
민플러스는 지난 7월 정전협정 특판을 제작한 바 있다. 특판에 실렸던 원고를 다섯 차례에 나누어 연재한다.
☞한국전쟁 제대로 보기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
정전협정과 전쟁체제
또다시 엄습해 오는 전쟁의 시간
‘그 전쟁’을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가
한국전쟁처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전쟁도 없다. 혹자는 6.25 전쟁, 6.25 동란, 6.25 사변이라고 부른다. 전쟁, 동란, 사변이 갖는 의미는 각각 다르지만, 6.25라는 이름이 붙는 이유는 같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북한에서는 그 전쟁을 ‘인민해방전쟁’,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38선 남쪽(남조선)의 인민을 미제의 압제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전쟁, 미국이 강점하고 있는 38선 남쪽의 조국을 해방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항미원조전쟁이라고 부른다. 미국에 대항하고(항미, 抗美), 조선을 돕는(원조, 援朝) 전쟁이라는 뜻이다. 반제 자주, 사회주의라는 공동의 이념을 갖는 중국과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미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벌인 전쟁이라는 의미다. 중국은 국공내전(1946~1949년) 당시 북한의 도움을 받은 바 있다. 그에 대한 보은의 의미도 담겨 있는 명칭이다.
미국은 ‘그 전쟁’을 ‘Korean War’라고 부른다. 한반도(Korea)라는 지역에서 남과 북이 벌인 전쟁이라는 뜻이다. 북한의 ‘기습 공격’을 받은 남한을 미국이 도왔다는 의미도 함께 담겨 있다. 그러나 이 명칭은 미국이 벌인 ‘침략전쟁’을 감추는 기능도 함께 한다.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력과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한반도 남쪽을 점령했다. 미군의 주둔과 점령 정책은 한국전쟁의 기원과 발단이 되었다.
본 글에서는 ‘그 전쟁’을 한국전쟁이라고 표기한다. 한국전쟁이라는 표현은 미국의 ‘Korean War’를 번역한 것은 아니다. 한국전쟁은 한국(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이라는 무미건조한 객관적 명칭이다. 이 명칭에는 전쟁의 주체도, 승자와 패자도, 전쟁의 발발 시점도 담겨 있지 않다. 즉 어떤 정치적 의미도 담겨있지 않다. 오직 우리의 삶의 터전인 한반도가 전쟁터였다는 사실만이 존재한다.
한국전쟁은 ‘남침’인가 ‘북침’인가
‘남침과 북침’, 한국전쟁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단어이다. ‘남침과 북침’ 관련한 한국전쟁의 성격 문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와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1970년대까지 한국전쟁의 성격 문제는 냉전적 대결의 연장선에 있었다.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권은 북한의 ‘남침’을, 북한과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권은 남한의 ‘북침’을 주장했다. 이때만 해도 공산권과 자본권 두 세력 사이의 주장만이 있을 뿐 ‘남침과 북침’ 여부를 가를 수 있는 다른 자료는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1970년대가 되면서 한국전쟁 연구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당시의 미국 비밀문서가 해제되어 공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비밀문서를 검토하고 분석한 사람이 바로 브루스 커밍스라는 미국 학자였다. 그는 ‘남침’, ‘북침’, ‘남침 유도’라는 세 개의 가설(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다는 뜻에서 커밍스는 각각의 가설을 ‘모자이크’라고 표현했다)을 세우고, 미국 비밀문서를 분석한 결과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는 가설을 ‘선호하는 모자이크’라고 주장했다. 커밍스의 이 주장은 당시에 획기적인 주장이었다.

그러나 커밍스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는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제기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결론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제목이 붙은 커밍스의 책은 1권이 번역되어 1980년대 한국 대학가에서 읽히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 번역서가 판매 금지될 정도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1990년대 탈냉전 시기를 겪으면서 한국전쟁 연구는 또 한 번의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이번엔 소련 문서가 공개되었다.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정부는 소련의 문서보관소에서 자료를 선별하여 공개하기 시작했다. 당시 옐친 정부는 반소 기치를 내걸었기 때문에 소련의 문서 공개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를 가졌다. 소련의 죄악상, 소련공산당 지도부의 추악한 면모를 발굴하고 부각하는 것이 문서 공개의 목적이었다.
공개된 소련의 문서는 두 가지 경로로 한국 사회에 들어오게 된다. 하나는 1994년 러시아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이 러시아 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받은 소련 문서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 언론들이 취재력을 발휘하여 소련 문서를 입수하여 공개하는 경로였다.
소련의 문서 공개는 새로운 파장을 일으켰다. 북한과 중국, 소련의 지도자들이 ‘남침’을 위해 여러 차례 비밀리에 회동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많은 기자와 연구자들은 ‘남침', ‘북침'에 대한 논란은 종결되었다고 선언했다. 소련에서 공개한 문서는 북한의 ‘남침'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공개된 소련 문서가 ‘남침'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러시아가 공개한 소련 문서의 신뢰성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우선 공개된 소련의 문서는 선별되고 가공된 것이다. 우리 언론이 받은 자료는 옐친 정부가 선별하고 가공한 것이다. 우리나라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러시아가 공개한 소련 문서는 러시아 역사연구소 부소장이 선별, 편집한 것이라고 소개한다.

다음 김영삼 대통령이 받아와서 우리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던 소련 문서가 있다. 그러나 당시 정부가 언론에 공개했던 것은 우리 정부가 받은 소련 문서가 아니라, 그 소련 문서를 토대로 우리 정부가 작성한 설명자료였다. 러시아 정부가 선별하고 가공한 자료를 우리 정부가 한 번 더 ‘마사지’해서 언론에 공개된 것을 우리 언론은 마치 소련 자료 원본인 것처럼 포장하여 보도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1994년 7월 21일 서울신문은 “6.25 남침 김일성 주동”이라고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마치 소련 외교문서에 위 표현이 있는 것처럼 인용 표시까지 했다. 그러나 이 보도는 기자가 소련 문서 원문을 보고 작성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외무부가 작성한 “한국전 문서 요약”의 내용을 기사화했을 뿐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소련 자료는 ‘북한의 남침’을 확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소련 자료를 근거로 많은 연구자가 ‘북한의 남침’을 기정사실로 단정하고, 이 논란은 종결되었다고 자신 있게 선언했다. 그러나 여전히 논란은 정리되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정리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외에도 한국전쟁 관련 학술 논문에서 북한의 ‘남침’ 근거로 활용되는 몇 가지 문서들이 있다.
미국이 공개한 자료 중 1950년 10월 4일 서울에서 확보한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의 정찰 명령 1호”가 있다. 6월 18일 북한군 총참모장이 사단급에 내린 보안 문서인데, 6.25 1주일 전부터 북한이 ‘남침’을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문서로 자주 인용된다. 러시아어로 작성된 이 자료는 영문으로 번역되어 공개되었다. 미국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어로 작성된 명령서가 소련군과 협의하기 위해 러시아어로 번역되었고, 이것을 노획한 미국이 다시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서의 원본은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 명령서에 거론된 지명 중에는 일본식 이름이 존재한다. 또한 이 문서는 손으로 필사한 것이다. 작성 부서, 서명, 도장도 없다. 객관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문서가 ‘남침’의 근거로 활용됐다.
한 가지만 더 언급하겠다. 우리나라에서 한국전쟁 관련한 가장 권위 있는 연구자 중의 한 명이 박명림 교수이다. 그는 북한군의 ‘공병 정찰계획’이라는 문서를 ‘남침’의 근거로 제시했다. 정찰 구역에 38선 이남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8선 이남에 대한 정찰계획을 세웠다는 사실 자체가 ‘남침’의 근거는 될 수 없다. ‘남침’ 의사가 없더라도 남한군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정찰계획은 수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남과 북은 빈번한 군사적 충돌을 빚고 있었다.
또한 이 문서는 정찰보고서가 아니라 정찰계획서이다. 실제 계획한 대로 정찰을 했는지 여부는, 이 문서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1950년 6월 25일 ‘남침이냐 북침이냐’ 하는 논란은 한국전쟁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실이 한국전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적다. 전쟁을 원한 세력, 전쟁의 수혜자가 누구였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한국전쟁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나?
남과 북에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1948년 8월 이전에도 한반도의 상황 특히 38선 이남은 전쟁 상태였다. 4.3항쟁과 여순 항쟁만 해도 그렇다. 4.3은 5.10 단독선거를 강행하려는 세력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세력 사이의 군사적 충돌이었다. 여순 항쟁은 4.3 항쟁에 나선 제주도민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일어난 무장 항쟁이었다.
1946년 대구에서 발생한 10월 항쟁 역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었다. 부산에서 시작한 파업 투쟁이 전국적으로 전파되었고, 10월 1일 대구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경찰이 총을 쏘아 1명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었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삽시간에 민중항쟁으로 발전했고 경상북도의 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미군은 탱크까지 동원했다.
결국 한국전쟁의 기원은 1945년 해방 직후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해방 직후 조선의 민중들은 자주독립 국가, 봉건적 토지문제의 해결, 친일파 청산을 위해 떨쳐나섰다. 미군정은 조선의 민중을 탄압하고, 자주독립 국가 건설을 저지하고, 한반도에 미국의 구미에 맞는 정치체제를 형성하려 했다.
따라서 미군정의 정책은 필연적으로 조선 민중의 의사에 반하고, 이익을 침해하는 방향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조선 민중은 미군정에 저항하여 투쟁할 수밖에 없었고, 미군정은 조선 민중의 투쟁을 탄압하고 진압했다. 미군정과 조선 민중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군정의 탄압은 군사적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처음엔 경찰을 앞세워 조선 민중을 탄압하다가 그것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되면, 제주 4.3에서 그랬던 것처럼,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했다. 군사력을 동원한 진압에 직면한 조선 민중의 투쟁은 필연적으로 폭력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초기엔 몽둥이, 죽창 정도로 저항하던 조선 민중은 4.3항쟁과 여순 항쟁에서 확인되듯이 무장을 갖춘 항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미군정과 함께 시작되었다. 미군정이 없었다면 그래서 민족 반역자를 처단하고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했다면, 조선 민중의 요구인 토지문제를 해결하고, 노동의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개혁이 실시되었다면 한국전쟁은 발발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민주개혁을 실시하여 자주독립 국가를 실현하고자 하는 세력과 새로운 외세인 미군정을 등에 업고 예속 정권, 분단 정권을 수립하려 했던 민족 반역 세력과의 피할 수 없는 정치·군사적 대결이었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