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에 드는 3가지 의문 (2)
광복 70여년이 흘렀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다. 반복된 강요로 굳어지고 엉켜버린 진실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 몇 가지 질문에 답해 본다. [편집자]
2차 세계대전 전범국 독일은 패전과 동시에 동·서독으로 강제 분할되었다. 그러나 같은 전범국 일본은 그대로 두고 식민지배를 당한 베트남(16°선)과 한반도(38°선)를 반으로 갈랐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 상황을 당사자인 우리는 너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75년 세월이 흘러 또 광복절이 왔다. 아직 분단을 극복하지 못해서일까? 새삼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일본 대신 왜 한반도를 갈랐을까?
한반도 38선 분할점령안은 1945년 8월 11일 작성해 사흘 후에 발표한 ‘일반명령 제1호’에 명문화되었다.
<일반명령 제1호>
“38선 이북의 일본군은 소련 극동군사령관에게 항복하고(2조),
38선 이남의 일본군은 미군 태평양육군사령관에게 항복한다(5조).”
미국 태평양육군사령관 맥아더가 전승국(미국·소련·영국)을 대표해 8·15광복 하루 전날 발표한 바로 이 ‘명령’이 75년째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다. 이후 맥아더는 ‘조선인민에게 고함’이라는 일명 맥아더 포고령(1945.9.7.)을 통해 38선 이남을 점령했다.
‘일반명령 제1호’가 작성되던 시기 일본과 전승국들의 움직임을 보자.
1945년 8일 8일 일본에 선전포고한 소련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은 시베리아와 연해주로부터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일본 관동군을 공격했다.
소련군의 진격이 빨랐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전쟁 종결이 급해졌다. 동유럽에서 독일 항복 전에 소련군이 진격한 지역이 소련 영향권으로 떨어진 일이 되풀이되는 것을 미국은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8월 10일에 일본이 항복 의사를 밝히자 미국은 ‘일반명령 제1호’를 서둘러 작성했다.
![▲ 1945년 8월 10일 밤 미국 전략정책단이 미국과 소련의 점령지역 분할에 쓴 것으로 알려진 지도. 만주를 소련이, 일본을 미국이 차지하면서 그 사이의 한국은 38선으로 나눠 가진다는 콘셉트가 드러나 보인다. [사진 : 김기협의 ‘해방일기’ 에서]](/news/photo/202008/10756_21996_3253.jpg)
10일 밤 38선 분할점령안을 ‘일반명령 제1호’에 넣기 위해 미국은 급히 삼부조정위원회(SWNCC)를 열었다. 당시 국무부 극동담당차관보 딘 러스크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38도선 탄생의 ‘목격자(eye witness)’였으므로 아마 보다 자세한 내막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급작스럽게 항복하게 되자 미 국무부와 군 당국은 10일 긴급한 협의에 들어갔다. 이날 회의는 거의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국무부 번스(Byrnes) 장관은 미군이 되도록 최대한 북상하여 38°선에서 항복을 접수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당시 나는 소련 측이 이 지역에서의 양국군의 위치로 미루어보아 훨씬 남쪽의 선을 고집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소련이 38선을 수락했을 때 꽤 놀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해서 38°선 이남의 일본군 무장해제 임무는 미군이 맡게 되었다. 그런데 그 38선이 이후 미군 점령선이 되고, 분단선으로 이어질 줄 그때는 몰랐다.
원폭 투하로 전후 처리 협상에서 발언권을 높인 미국은 그때부터 38선 이남을 점령하고 중국 국민당을 도와 공산당을 제압함으로써 아시아 침략의 발판을 마련할 계획을 이미 세웠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소련은 김일성 사령관을 비롯한 조선인민혁명군이 건재한 데다 당시 우파 독립운동가들이 대부분 일제에 투항했지만 사회주의자들은 항일을 계속해 왔기 때문에 일본만 물러나면 조선은 자연스럽게 공산화 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일까?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해 이튿날 총독과 일본군사령관의 항복을 받아낸 맥아더는 ‘포고령 1호’에서 자신들을 점령(occupy)군으로 명기한 반면, 나진 청진을 거쳐 8월 22일 평양에 진주해 일본 관동군 제34군을 무장 해제시킨 소련군은 사령관 치스챠코프의 포고문에서 소련 ‘붉은 군대’가 조선을 해방(liberation)시켰다고 쓰고 있다.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전범국인 일본 대신 한반도와 베트남을 반으로 갈라 아시아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았다는 추론은 남한과 남베트남에 '동시선거' 약속을 깨고 이남 단독으로 세운 친미정권을 통해, 그리고 이후 터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그대로 입증되었다.
